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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3. 13世 〉1. <요재공>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모암공휘덕인행록(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慕菴公諱徳隣行錄)
1. 문헌 목록 〉13. 13世 〉3. <요재공>참봉공휘원유적비문(參奉公諱源遺蹟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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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요재공>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모암공휘덕인묘갈명(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慕菴公諱德隣墓碣銘)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慕菴公諱德隣墓碣銘 嗚呼此故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趙公諱德隣之墓也公字友賢號慕菴系出玉川今爲淳昌郡初祖高麗大將軍諱璋累傳至玉川府院君忠獻公諱元吉罔僕于朝鮮與圃牧陶冶四隱幷公農隱世稱五隱副正諱瑛太宗朝屢徵不起司正諱龜山郡守諱士淳持平諱溥公之五世以上也訓導諱希忠司諫諱潤屋參奉諱繼弘敎授諱邦寶高曾祖考稱也公自世居之淳昌贅寓于高敞之儉岩當壬辰倭亂欲與同志擧義兵而老親下獨子不果乃負親隱山採蔬拾果以爲養時或登高北望痛哭遂傾家儲輸納于長城募義所諸公欽歎以爲忠孝兩兼亂平轉移縣之使臣院隔以仁江以江湖散人作烟波釣叟常#國恥未雪杜門自廢詩酒自遣每醉必誦武侯出師表澹菴斥和疏長呼短嘆至於泣下其遯世之樂傷時之憂知者鮮矣嘗築丁巳訓誨後進至今遺址尚稱書堂洞又建三賢影堂于仁江上春秋俎豆以寓奉先慕賢之誠三賢即公之曾祖遯世菴公端廟遜位後與其友人申公末舟張公肇平鮮官同歸者也光海祖彛倫斁絶近郡友人金克成持平李垓進士者和附時議將陳廢母疏要與同叅公正色峻靑即爲絶交時禍色滔天朝野懔懔人皆爲公危之而公毅然晏如也朝廷甞擧遺逸特除慶基殿參奉不就後以壽陞僉樞公生于明宗甲子西紀一五六四年卒于己未西紀一六一九年十月二十日享年五十六墓在仁江上子坐阡淑夫人昌寧曺氏憲女直提學庶后葬用魯禮擧二男涵通德郎淑將仕郎相弼相元康麟長房子若婿也相夏時雄相説金起南季房子若婿也曾玄以下多不錄嗚呼公之隱德至行不畜如右所陳而累經兵火散亡殆盡雲仍不振墓無顯刻今將伐石以表之聲振君文行士於狀碣銘余有同硯舊契且感公行高遂不固辭而爲之叙若銘銘曰遭亂養親斥邪扶倫曰孝曰忠百世可傳此其大節一擧三反孰爲徵信惟石一片 檀君紀元四二八一年戊子季春 蔚州 金魯洙 撰 安東 金正會 書 有司 東遂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모암공휘덕인묘갈명(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慕菴公諱德隣墓碣銘) 嗚呼라. 이는 故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 趙公 諱 德隣의 墓이다. 公의 字는 友賢이고 號는 慕菴이며 玉川에서 出系하니 지금 淳昌郡이다. 初祖는 高麗 大將軍 諱 璋이고 累傳하여 玉川府院君 忠獻公 諱 元吉에 이르러 朝鮮朝에 不臣하니 圃隱·牧隱·陶隱·冶隱의 四隱과 함께 公 農隱을 아울러 世稱 五隱이라 했다. 副正 諱 瑛은 太宗祖에 여러 번 불렀어도 나아가지 않았고 司正 諱 龜山 郡守 諱 士淳 持平 諱 溥는 公의 五世 以上이다. 訓導 諱 希忠 司諫 諱 潤屋 參奉 諱 繼弘 敎授 諱 邦寶는 고조·증조·조부·아버지이다. 公이 世居하던 淳昌에서 高敞 儉岩으로 移寓했는데 壬辰倭亂을 당하여 同志와 함께 義兵을 일으키려다가 老親下에 獨子라 果斷을 못내고 이에 어버이를 업고 山으로 들어가 나물 캐고 과일 주워 奉養하며 때론 높은 데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痛哭했다. 그리하여 家產을 기울려 長城 募義所에 輸納하니 諸公이 欽歎하기를 忠孝兩兼이라 했다. 亂이 平定됨에 同縣 使臣院으로 轉移하니 仁川江을 隔하여 江湖散人으로써 아지랑이 낀 물결에 낚시질 하는 늙은이가 되어 언제나 國恥에 雪辱 못한 것을 憤하게 여겨 杜門 自靖하며 詩酒로 세월을 보냈으니 술이 취하면 반드시 諸葛武侯의 出師表와 胡澹菴의 斥和疏를 외며 長嘆息을 하다가 울기까지 했으니 세상 숨어 사는 즐거움과 時節 哀傷히 여기는 근심을 아는 이가 적었다. 일찌기 精舍를 지어 後進을 가르쳤으니 지금도 遺址 書堂洞이라 이른다. 또 三賢의 影堂을 仁川江 위에 세워 春秋로 爼豆로써 奉先하고 慕賢하는 정성을 붙였으니 三賢은 곧 公의 曾祖 遯世菴公으로 端宗 遜位 후에 그의 벗 申公 末舟 張公 肇平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함께 歸鄉한 분들이다. 光海朝 倫綱이 杜絶될 때 隣近 郡에 살던 벗에 持平 金克成과 進士 李垓란 者가 있어 時議에 附和하여 장차 廢母疏를 올리려 하면서 同叅하기를 要求할세 公이 正色을 하고 준절히 나무라고는 바로 絶交를 하니 禍色이 衝天하고 朝野가 위태위태한 때라 사람들이 모두 公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으나 公은 毅然히 편안한 듯 하였다. 朝廷에서 일찌기 遺逸로 천거를 받아 특별히 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뒤에 壽로 僉樞中樞府事에 올랐다. 公이 明宗 甲子(西紀 一五六四年)에 生하여 己未(西紀 一六一九年)十月 二十日에 卒하니 享年이 五十六이고 墓는 仁川江 위 子坐 둔덕에 있다. 淑夫人 昌寧曺氏는 憲의 따님이오 直提學 庶의 后로 葬禮는 魯禮(祔墓)를 썼다. 二男을 두니 涵은 通德郎이고 淑은 將仕郎이다. 相弼 相元과 康麟은 長房의 子若婿이고 相夏 時雄 相説과 金起南은 季房의 子若婿이다. 증손·현손 이하는 많아서 收錄하지 못한다. 嗚呼라. 公의 숨은 德과 지극한 行儀를 남겨두지 않고 위와 같이 진술한 바 여러 번 兵火를 겪어 文獻이 거의 없어지고 자손이 不振하여 墓에도 나타나게 刻한 것이 없을 세 이제 장차 돌을 깍아 表石을 하려 하면서 文行의 선비 聲振君이 行狀을 안고 碣銘을 請하는데 내 벼루를 같이한 옛 친구요 또 公의 높은 行誼에 感服되어 이에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叙와 銘을 한다. 난리를 만나 養親을 하고 邪를 물리쳐 倫綱을 扶植했네. 孝와 忠은 百世에 傳할만하고 이것이 大節이라 一面을 들매 三面을 알 수 있네. 무엇으로 고증하여 믿게 하겠는 가? 오직 한 조각 돌이로세. 西紀一九四八年戊子季春에 蔚州 金魯洙 撰 安東 金正會 書 有司 東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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